황인상 기자 his@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 중 전역한 고 교수는 국립목포해양대학교 교수로 공채되어 해군과 함께 대한민국 해양력 구성의 한 축인 상선사관 양성 교육에 11년째 헌신하고 있으며, 금년 2월말 41여 년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는 정년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광섭 교수의 본래 주 전공 분야는 전자공학에 기반을 둔 전자항법·인공위성항법(GPS) 분야이다. 고 교수는 국내에서 항법공학 석사 공부를 마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인 해사에 복귀했다. 30여 년을 해군 장교이자 해사 교수로 해군에 복무하면서 국내의 GPS 전문가로서 해양계 첨단 항법 전문분야 연구와 교육을 선도했다.
41년 공직 마무리하는 충무공의 후예

고광섭 교수가 늘 밝혀왔듯이 이순신에 대한 관심은 충무공 후예인 해군사관생도 시절부터였다. 해사 생도면 누구나 ‘충무공 정신’을 정규 교과과정으로 이수해야하지만, 임관 후에는 이순신 연구나 공부는 본인의 의지가 없다면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고 교수 역시 초임 장교 시절부터 이순신 연구에 대한 관심은 많았으나 전공 연구와 교육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고 교수가 연구하여 논문으로 공개한 내용은 기존의 역사학자나 이순신 연구가들이 반복 인용해 왔던 우리가 잘 몰랐던 이순신 역사에 대한 오류들을 증명하는 데 치중했다.
그 첫 번째가 ‘안편도 지리적 위치 오류 확인 및 이순신의 해상 기지 안좌도 수군기지 발견’이다. 명량해전 대승 후 이순신이 적의 보복을 피해 한반도 서남해를 항해하다 안편도라는 섬에 상륙하여 18일간 체류한 적이 있다. 이순신은 1597년 음력 10월 11일 ‘안편도’에 상륙 후 산에 올라 지형정찰 결과를 당일 일기에 기록했다.
훗날 이 섬이 우리 역사 지도에 없는 관계로 신안군 소재 ‘팔금도 또는 장산도’로 추정되어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고 교수는 이순신이 일기에 기록한 내용과 실제 지형지물의 방향과 위치가 전혀 다름을 발견하고, 이순신이 상륙한 섬은 당시 기좌도(현 안좌도), 상륙 후 오른 산은 매봉산임을 확인해 2018년 논문으로 발표했다.
두번째는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사 오류 확인 및 이순신 항명설 허구 입증’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국민 대다수의 기억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면되고 백의종군 주요 요인을 정유재란 시 부산으로 쳐들어오는 왜군을 치라는 선조의 출전 명령을 이순신이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이순신 항명설은 몇몇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가장 근원적인 사료는 이순신 사후 60여 년 후에 완성된 ‘선조수정실록’의 1597년 2월 1일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선조의 명령을 전달받고 몇몇 이유를 들어 출전하기 어렵다는 내용이 명확하게 나온다. 이게 근원이 되어 수백 년 동안 반복 인용되어 최근까지 이순신의 항명설은 당연시 되었다.
그러나 고광섭 교수는 1차 연구에서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 내용 중 시점, 인물 등의 심각한 오류를 선조실록과 이순신의 장계를 토대로 발견하고, ‘이순신의 출전 거부설 또는 항명설’ 의 근간이 된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의 신뢰성에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이어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에 오류가 있고, ‘이순신의 항명설’도 사실로 볼 수 없다는 1차 연구 결과는 2차 연구에서 사실로 밝혀졌다. 2차 연구에서는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을 지휘했던 4도 체찰사 이원익의 일대기를 기록한 ‘오리선생 문집’ 에 수록되어 있는 이원익의 장계 내용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고 교수는 “정유년 1월 정유재란 발발 당일을 포함한 적 침공 전·후 체찰사 이원익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 내용에는 이순신과 이원익이 함께 논의한 왜군 침공에 대한 이순신의 작전계획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즉 직속 상관인 체찰사에게 보고한 이순신의 작전계획은 ‘부산 앞 바다로 직접 출동해 적을 친다.’였습니다”면서 “오히려 출동 중에 적에게 노출되면 적을 치고 진격하겠다는 매우 공격적인 작전계획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전장에서 이순신과 함께 작전을 논의했던 최고 사령관인 체찰사 이원익의 위와 같은 장계 내용은 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기록과는 완전 배치되는 것으로 일명 ‘이순신의 항명설’을 뒤집는 결정적인 사료임이 확인된 셈이지요”라고 밝혔다. 이러한 1·2차 연구 결과는 논문으로 작성해 관련 학회 논문지 게재, 언론공개 및 이순신 연구 전문가들과 합동 세미나도 개최한 바 있다.
‘이순신학’ 체계 정립과 세계화를 위해 노력할 것
고광섭 교수는 스스로 본인은 공학자로서 해군·해양 전문가로서 새로운 시각으로 이순신 역사를 바라보면서 합리적 의심이 가는 분야를 선택해 집중 연구했다고 강조했다. 또 최근에는 2022년 2학기를 마지막으로 정년을 하게 된다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학 강의 최초로 ‘이순신학(개론)’ 1강부터 30강까지 영상을 제작해 전국의 학생들이나 일반 대중들이 이순신을 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유튜브에 공개했다고 한다. 특히 제 3강에는 이순신학을 강의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이순신이 남긴 12 교훈을 정립해 공개했다. 고 교수는 정년 후의 계획도 밝혔다.
아직까지 이순신 연구가들이나 학자들에 의한 체계적인 이순신 관련 영문 서적이나 영문 콘텐츠들이 많지 않다면서 앞으로 영문 서적 발간, 영문 영상 제작 및 유튜브 공개 등 이순신 세계화를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해군복무 30여 년 및 목포해양대학 교수 11년 등 41여 년 동안 공직 생활을 하면서 충무공 이순신을 롤 모델로 하여, 공직자로서의 명예심과 투철한 국가관을 갖고 절차탁마하며 진충보국의 자세로 오직 대한민국 해양력(Sea Power) 구성 요소의 핵심인재가 될 해양사관의 교육과 양성에 평생을 기여한 고광섭 교수의 끝없는 이순신 사랑과 열정적인 연구 그리고 이순신 정신과 교훈 전파를 기대한다. NM
황인상 전문기자 his@newsmaker.or.kr

1598년 7월 19일 아침. 임진왜란에 마침표를 찍은 노량해전이 일어나기 불과 5개월여 앞둔 이 시기, 절이도(현 고흥 거금도) 앞바다에서 왜 함선 100여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을 막아선 건 이순신 장군의 60여척 함대.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학익진(鶴翼陣)을 전개, 왜선 50여척을 수장시키고 대승을 거뒀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펴는 모양을 본 뜬 것으로, 원을 그리면서 적을 둘러싸는 전법이다.
‘절이도 해전’은 최근까지도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난중일기에는 단 1줄만 적혀 있는데다, 사료가 부족해 연구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탓이 크다.
‘이순신의 잊혀진 해전’으로 불리는 절이도 해전을 최근 과학적으로 밝혀낸 이가 있다. 2011년부터 이순신을 연구해 온 목포해양대학교 고광섭(63) 교수다.
고 교수는 ‘항법 전문가’다. 광주고(23회)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해양대 대학원에서 항법학을 전공, 미국 클락슨대 대학원에서 전자항법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1년까지 해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한 뒤 목포해양대로 자리를 옮겨 이순신 장군 관련 연구에 매달렸다.
“사학자들은 사료가 없으면 연구에 난항을 겪습니다. 대신 저는 전공 분야인 항법공학을 최대한 활용해 연구했습니다. 실록, 이충무공행록, 난중일기 등을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의 전술진형을 분석, 절이도 환경에 적용해 가장 적합한 상황을 이끌어낸 것이지요.”
고 교수는 최근 논문 ‘이순신의 잊혀진 해전 절이도 해전의 교전 상황 및 학익진 연구’를 발표, 해군과학기술학회지에 게재했다. 항법, 해양전략·전술 등을 바탕으로 시뮬레이션을 거쳐 절이도 해전의 전투장소, 일자, 전투방식 등을 밝혀낸 논문이다.
논문에 따르면, 7월 19일 새벽 5시께 조선 수군 경계부대가 적함을 발견한 뒤 긴급 출동, 현 거금도 고라금 해수욕장 앞 우동도 서북쪽 1~2㎞ 해역에서 교전했다. 절이도 해역은 교전 공간과 함대 이동 방향 등에서 학익진을 펼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는 만큼, 이순신 장군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승을 거뒀다.
“420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당한 가치가 있는 해전이에요. 절이도 해전은 한산대첩에 이어 수적 열세를 학익진으로 돌파한 또 하나의 사례인 셈이니까요.”
고 교수는 연구 배경과 관련, “이순신은 나의 숙명이자 사명”이라고 답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일 때부터 난중일기를 늘 갖고 다녔으며, 이순신 장군의 호국 정신과 리더십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향토사학자 외에는 이순신 장군을 연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도 연구 의지를 북돋았다.
“충무공의 혼은 우리 호남 지역에 많이 배어 있어요. 저 또한 호남인으로서, 그 정신을 호남인의 정신과 연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의무감도 있지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심에 그치지 않고, 그 발자취와 실체적인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이번 논문에 앞서 주목할만한 연구 결과도 있었다. 그는 지난 3월에는 난중일기 등에서 등장하지만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던 ‘안편도 수군기지’가 신안군 안좌도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고 교수는 “대학에서 충무공 정신과 이순신 리더십을 강의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며 “바다 ·해군 전문가로서 연구를 계속해 추정에 불과했던 난중일기 속 해전의 전투 경과를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이순신학, 이순신학개론, 이순신 불멸의 12교훈을 말하다
https://youtu.be/ByVSz1BASqc
이순신학개론 제 20강 이순신 항명은 허구, 수십년의 합리적의문 10여년의 연구와 사료 입증
https://youtu.be/sZ71-n6GW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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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학 이순신학개론 절이도해전 실체 공개! 잊힌해전! 학익진으로 왜수군을 대파한 절이도해전! 한 고광섭 교수의 연구 최초 공개
https://youtu.be/c8ER6KKsMgY
임진왜란해전 시로 그려낸 13척 기적의 명량해전, 승전 직후 후퇴를 해야 하는 이순신 장군의 가슴아픈 심정과 구국의 심정을 시로 표현하였다.
https://youtu.be/GoJ05_hQY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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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몰랐던 이순신 왜구후손격파기
https://youtu.be/2_exuJWwsac